사고무친(四顧無親)인 내게도 인정의 입김이 서려서 한 집안을 꾸리게는 되었지만 막막하긴 언제나 매한가지다. 환하던 빛도 이내 꺼질 것처럼 뿌옇기 일쑤인 것에 익숙해 있긴 해도 늘 불안은 가시지 않는다.
입김은 내 영혼을 적셔주었지만 내 허울을 지탱하지는 못하였다.
모두가 제 살 궁리를 찾기 위해서 눈이 벌겋게 설치며 대상을 찾아 굳히며 동아줄로 엮어 동이려 한다. 줄을 찾아서 그만그만한 자질을 감추며 땅재주, 줄타기, 작두 오르기를 수없이 반복해도 시비가 일지 않는 굴절된 세상에서 나 홀로 구경꾼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곡마단 패거리에 섞여서 시늉해 보지만 어색하기 그지없어서 곧바로 밀려 나와 구경꾼이 되어 버린다. 되든 안 되든 안에 들어가 뛸 요량으로 가진 궁리를 다 해도 역시 오리무중의 내 끄나풀이니 허우적거릴 뿐이다.
어느 날이던가, 군영(軍營)에서 만난 수용소에서의 한때 짝이었던 친구가 이른 말이 생각났다. 자기가 입대 전에 몸담았던 대구의 화투 공장 주인이 ‘이 아무개’인데, 그 사람의 동생이 이 누구이며 야전사령관이면서도 한 번도 형을 돌보지 않고 청렴한 군 생활을 한다고 했다.
형 또한 동생의 성품을 알고 형제애로써만 왕래할 뿐, 아무리 어렵고 고통스러워도 동생에게 구차한 소리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전형인 함경도 기질의 형제라 했던 그 형은 나도 한때 일 했던 그 공장 주인이기에 얼른 이해할 수 있었다.
세상이 바뀌어서 이제 그 장군은 옷을 벗고 정부의 요직을 맡았다는 신문 보도에 접하고, 나는 그 끈을 찾으려고 한다.
건설부 장관직을 맡은 그 예편된 동생을 통해서 이미 십 오륙여 년 전에 대구에서 인연 맺은 이 아무개를 찾아서 그를 통하여 장관의 힘을 빌려서라도 내가 몸담았던 대구 건설회사의 공사 수주에 어떤 작용이 되지 않을까 하는, 야문 꿈을 꾸었다.
대구에서 잠깐 인연 맺었던 장관의 동생을 찾는다는 내용으로 장관 앞으로 장문의 편지를 썼다. 그런 일이 있었던 후, 내 바쁜 몸이 전국을 내 집인 양 흘러 다닐 즈음에 대구의 빈 우리 집의 우편 수취함에서 한 장의 묵은 편지를 발견했다.
그때 나도 곡마단에서 땅재주를 넘는 기쁨이 와 닿았다.
여러 날을 견주고 틈을 내서 종암동의 어느 한옥에서 예의 ‘이 누구’를 만났다. 그 어른은 특유의 포용력으로 나를 감싸 안았고, 장관실에 들렀을 때 비서가 전해주어서 알게 되었다며 내 편지를 보여주었다. 나도 격의 없이 내 의중을 토로했다. 그러나 무지개는 곧 사라지고, 허망한 사기성만 들어낸 내 몰골이 돌이킬 수 없도록 처참했다. 불로소득, 한탕을 꿈꾼 나의 발상은 애초부터 뜬구름 잡기였으니 어찌하랴!
동생은 국토의 개발과 건설을 통째로 주무르는, 나라의 재상이면서 그 형은 남의 집 곁방에 셋집으로 사는 이 형의 삶이 내 지금의 행동에 적지 않은 무게를 실어주었다. 내 눈을 의심하게 한 형의 전혀 서운한 기색 없는 몸가짐에 거듭 놀랐다. 허황한 꿈길에 여기까지 온 내게
그 형의 곁방 생활, 어느 방송국 무용수가 되었다는 딸, 이 두 전극(電極)은 내게 충격을 주면서 내 정신을 되돌렸다.
시도부터가 순수해야 했다. 내 착상(着想)은 어쩌면 광대의 꼭두각시가 광대를 움직이려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형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힐난의 소리로 내 귓전을 맴돌면서 내내 끊이지 않는다.
도시의 소음이 혼탁한 내 마음과 범벅이 되어서 뿌옇던 이 길, 되돌아가는 지금은 씻은 듯이 고요하고 맑게 개어 확 트여있다.
마음이 가볍다.
꿈은 깼다./외통-